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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종류



글의 종류는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의 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 글을 쓰는 사람의 동기, 글을 읽는 사람의 성격,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우선 떠올릴 수 있는데 이 모두를 묶어서 입장(立場) 또는 처지(處地)라 한다.

실용문(實用文) - 글을 쓰는 사람의 동기는 전달에 중점을 두느냐, 표현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가를 수 있다. 전달에 중점을 두면 내용을 명확하게 서술해야 하고 그 내용이 타당해야 한다. 

문예문(文藝文) - 표현에 중점을 두면 효과적인 표현 방법을 모색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강구해야 한다. 

글을 읽는 사람의 성격은 독자의 범위가 제한되느냐 개방되어 있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규, 기소장. 판결문, 담화문.진정서, 성명서, 결의문, 행정에 필요한 공문, 편지와 일기 등은 모두독자의 범위가 제한되지만 
문예문과 실용문의 대부분은 독자의 범위가개방되어 있다.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의 관계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놓여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학문을 하는 대학에서 쓰는 중요한 글은 전달에 중점을 두고, 독자의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놓이지 않는 것이 중심을차지한다.

글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문(漢文)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한문의 종류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입장이 제시되었다. 한문에서는 글의 종류를 문체(文體)라 한다.신라 이후 조선초기까지의 글을 모은 『동문선(東文選)』에는 모두 50여종 이상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는 정치에 관한 글도 있고, 종교의식에 쓰이는 글도 있고, 죽은 사람을 애도하거나 행적을 기술한 글도 있어서 일반적으로 논의하기가 쉽지 않다.

한문의 문체는 보통 다음과 같이 가르기도 한다.

논변류(論辨類)는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시비를 가리는 글이다. 허균(許)의 「호민론(豪民論)」이 유명하다.

주의류(奏議)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다. 김창협(金昌協)의 「사호조참의소(辭戶曹參議疏)」가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조령류(部令類)는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유조(遺品)」를 들 수 있다.

서독류(書順類)는 편지글이다. 이제현(李齊賢)의 「상원백주승상서(上元伯住丞相書)」는 공적인 성격을 띠면서 간곡하게 하고자 하는 말을다 한 글이다.

서발류(字成類)는 글이나 책의 앞뒤에 붙이는 글이다. 성현(成恨)의「악학궤범서(樂學軌範序)」,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등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증서류(序類)는 친교가 있는 사람이 먼 길을 떠날 때 지어주는 글이다. 이식(李植)의 「송채사서유후부북막인(送蔡司書裕後赴北幕引)」을예로 들 수 있다.

전장류(傳狀類)는 전기와 행장으로 사람의 일생을 기술한 글이다. 김부식(金富)이 쓴 「온달전(溫達傳)」이 생동감이 넘치면서 간결한 장점을 지니고 있고,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兩班傳)」은 사회비평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잡기류(雜記類)는 산천, 누대, 대소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린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사실적인 기교가 돋보인다.

애제류(哀祭類)는 죽은 사람을 애도한 글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비롯하여 장유(張維)의 「제김이호문(祭金而好文)」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비지류(神誌類)는 인물의 행적을 운문에 가깝게 돌에 새겨 세우거나 묘속에 묻는 글이다. 박지원(朴趾源)의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과이건창(李建昌)의 「유수묘지명(兪빗墓誌銘)」이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잠명류(箴銘類)는 권려와 경계의 말을 적은 것이다. 이달충(李達衷)의 '애오잠(愛惡箴)」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사부류(賦類)는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서 유래한 글로 운문과 산문의 중간적 성격을 띤 글이다.

송찬류(頌贊類)는 인물이나 사물에 대해 찬미하는 글이다. 이색(李협)의 「판삼사사최공화상찬(判三司事崔公畵像贊)」은 최영(程)의 화상을 보고 그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글이다.

필기류(筆記類)는 각종 소품과 고사 등을 묶은 것으로 자유롭게 쓴 글로 필기소설류(筆記小說類)라 할 수 있다. 성현(成)의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이나 박지원(朴址源)의 「허생전(許生傳)」 등 많은 글이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종류와 문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문체는 글의 표현이 갖는 특성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그러나 한문은 우리말의 표현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다양한 문체로 쓰였다. 일찍부터 우리말의 어법이 많이 포함된 속한문체 (俗漢文體)가 쓰였는데, '임신서기석(王中記石)」이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는 이른바 차자표기(借字表記)로 구결(口), 이두(吏讀), 향찰(鄕札) 같은 것이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 언해체(諺解體)가 나타났다. 언해는 원문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 해석을 표준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다음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살리면서 독자적인 문체를 이루어 갔는데 국문시가 · 국문소설에서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창조적으로 활용해야 할 보고라 할 수 있다.


고전 국문은 당대에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분류체계라 할 수 있는 갈래론에서 쟁점이 남아 있다.


국문으로 쓴 글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편지글인 내간(內簡),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제문(祭文), 그리고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과 같기행(紀行), 『계축일기(癸丑日記)』를 비롯한 일기(日記), 『한중록(閑中錄)』을 포함한 실기(實記), 잡문(雜文), 희필(戲筆), 소설(小說)등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한문(漢文)과 국문(國文)으로 된글을 하나로 묶으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893년의 「동학혁명격문은 국문을 택하고 한자어에는 한자를 병기하는 이중의 표기를 하였고, 1894년 11월 21일 모든 법령·칙령 등은"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부역 혹은 국한문은 혼용 한다는 규정을 제정했다. 1895년 간행된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은 국한문 문체로,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순국문을 지향했다.

1909년 이재학(李在學)의 『실지 응용작문법(實地應用作文法)에서는한문작문법을 계승하여 글의 종류를 논(論), 설(說), 전(傳), 기(記),서(序), 발(跋), 제(題), 축사(祝), 문(文), 서(書), 찬()으로 조정했다. 1916년 최남선(崔南善)의 『시문독본(時文讀本)』에서는 국한문체와 순국문체가 공존한다. 이태준(李泰俊)의 『문장강화』에는 글의 종류를 일기문, 서간문, 감상문, 서정문, 기사문, 기행문, 추도문, 식사문. 논설문, 수필문의 순서로 들었다.

중세기의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한 한문, 일제 강점기의 일본어, 그리고 광복 이후 영어를 비롯한 서양어의 영향으로 우리가 쓰는 글의 종류는 너무나 많이 바뀌어 왔고 현재에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오늘날 전자통신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기존의 글쓰기 관습과 너무나 동떨어진 경우가 많아 당혹감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글의 종류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거나 바뀔 것이고, 문체는 더욱 다른 모습을 띨 것이다. 이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들의 삶을 살찌게 할 수 있는 글은 어디에서 마련해야 할까? 우리말에서 찾는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고, 바로 우리의 고전 국문에서 활용할 수 있는무궁무진한 자료가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문의 이론과 실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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