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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이란 무엇인가?

1.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페르디낭 드 소쉬르
기호들의 세계, 우리는 날마다 그 안에서 삶을 영유하고 있다. 거리의 신호등에서부터 밤하늘의 별자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눈이 이해하는 모든 것들이 기호이다. 우리는 기호를 터득하여 세계를 이해하며, 기호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기호에 의해서 우리가 소망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을 꿈꾼다.
기호가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고, 기호가 없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가 기호이고, 인간의 생각이 미치는 모든 것에 기호의 망이 펼쳐진다.

이렇듯 기호들이 인간의 삶과 깊숙이 얽혀 있기 때문에, 기호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을 이룬다. 철학과 심리학과 기호학은 3대 기본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이 인간의 사상을 탐구하고, 심리학이 인간의 정신구조를 탐구하는 기본 학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호학은 인간이 다루는 모든 상징체의 구조와 그것이 체현하는 사상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귀도르는 기호학을 기호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문이라고 간단히 정의했지만, 좀 더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기호학은 상징체의 창조와 의미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상징체가 어떤 구조로 만들어져 있으며,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기호학이다. 기호들은 우리의 일상성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어서 마치 당연한 것들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신기한 것이 숨어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의 의미가 바뀌면 우리의 인간성 자체가 바뀐다. 인간과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호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소쉬르는 기호학을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기호들의 삶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기호들의 삶과 인간들의 삶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더욱이 기호들이 겪는 역사와 인간들이 엮어내는 역사는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것이 기호학적 요소를 그 근본에 지니고 있음에도 기호학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기호학은 모든 학문에 편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에코나 프랑스의 보드리야르는 기호학은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호학의 요소들은 문학, 예술, 건축, 과학, 공사, 군사학, 정치학, 의학, 동물학, 사회학, 철학, 인류학 등 모든 학문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기호학은 학문의 영역 뿐 아니라 일상성 안에서도 기호가 편재한다.

기호학은 일상생활에 널리 퍼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호학이란 말 자체는 사람들의 귀에 생경스럽게 들린다. 기호학의 이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을 새롭게 관찰하고 음미하고 해석하는 신선한 시각을 준다. 기호학은 유럽과 북미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음에도 주로 유럽에서 신학문으로서 개화되었다. 초기의 기호학은 북미의 실용주의 철학에서 자라기 힘들었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이란 개념이 더욱 짙어지게 된 이유이다. 그래서 유럽 전통의 기호학이 북미의 관심을 끈 것은 상당히 문화적 지연이 있은 후의 일이다. 기호학에 대한 북미의 관심은 최근에야 일기 시작했다.

유럽보다는 미국의 문화적 변화에 민감했던 우리나라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기호학이라는 말보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이 익숙하게 들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현대 기호학은 일반적으로 문화현상과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문화현상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모든 현상, 가령 정치, 경제, 종교, 사회현상 등에도 주목한다.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기호학은 기호에 의해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다. 에코에 의하면, 기호학이란 모든 문화의 과정을 커뮤니케이션과정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문화를 연ㅇ구하는 학문이다. 문화는 전적으로 기호학적 입장에서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입장에서 문화와 더불어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사회적 작용력으로서의 기호를 연구하는 것이 기호학의 주제라고 에코는 말한다. 기호는 사회적 작용력의 체현일 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일으키는 주제가 된다.

기호학에서는, 기호의 조직 원리를 코드라고 부르고 코드에 의해 생산된 산물을 일반적인 말로 텍스트라고 부른다.

기호학의 전통은 철학의 전통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스토아학파,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 근대 철학자들이 모두 기호와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중국에서는 역(易)의 체계가 바로 세계에 대한 기호학적 해석을 시도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기호학은 과학적 경험주의, 즉 논리 실증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체계화하였으며, F.de 소쉬르, C.S.퍼스, C.W.모리스 등의 작업으로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때 비로소 기호학이 독립된 학문의 한 분야로 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언어기호학, 시각기호학, 건축기호학, 음악기호학, 연극기호학, 문학기호학, 텍스트기호학 등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삶을 포함하여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들은 문자를 포함한 상징(symbol)과 도상(icon), 지표(index)로써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서로 의사를 소통한다. 여기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 내는 행위를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하고, 의미 작용과 기호를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행위를 커뮤니케이션이라 하며, 이 둘을 합하여 기호 작용(semiosis)이라 한다. 기호학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 그리고 기호 자체로 구성된다.

기호학이 의미 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이면서도 특히 의미 작용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정신적 과정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만일 인간의 삶 전체를 문화라고 한다면 문화야말로 기호 작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질서에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번역, 해석하여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바꾸어 나간 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호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서 살다가 그 안에서 죽는 것이다. 오늘날 기호학이 기호가 가진 힘과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몫뿐만 아니라 기호의 과잉에 따른 위험을 지적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방대한 정의와 방대한 내용을 가진 기호학을 짧은 과제에서 설명 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일일지는 모르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개념을 살펴보고 이론적 토대를 알아봄으로써 간략하게나마 기호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기호학의 탄생                                                      


기호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기호학이 기호, 의미,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그런 주제들에 대한 고찰과 논의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거의 모든 사상의 역사에서 언어 기호의 본질과 성격, 기능, 한계 등에 대한 고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철학자들, 에피쿠로스학파, 성 아우구스티누스,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풍부하고도 다양한 논의와 견해들을 제시하였다. 또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철학,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상에서도 기호와 언어에 대한 흥미로운 관념들을 찾아볼 수 있다.
기호들의 작용 원리에 관심을 기울인 분야들도 다양하다. 논리학과 형이상학, 인식론, 수사학과 시학, 의학, 점성술, 관상학, 문장과 표장의 이론 등에서도 기호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기호학의 뿌리는 인류 역사의 아주 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논의들은 오랫동안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것들은 대부분 철학이나 신학 등의 다른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부차적인 문제로 언급되었고, 따라서 논의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산발적인 지식과 관찰에 머무르는 경우기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논의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호가 일차적인 중심 문제로 고려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오랜 세월 그것들이 기호학 또는 다른 어떤 이름의 독립적인 학문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 기호학은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언어학, 철학, 문학, 심리학, 문화 인류학 등 다양한 인문과학 분야의 학자들이 각자 고유의 영역에서 새로운 분석 도구로 기호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구체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서로 상이한 여러 분야에서 시작된 만큼 기호학의 갈래들도 다양하다. 실제로 거의 모든 인문과학뿐만 아니라 일부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기호학의 기본적인 개념들과 방법론이 활용되었고, 또한 역으로 기호학은 여러 학문의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고유의 영역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더욱 폭넓고 또한 상이한 방향들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비교적 뒤늦게 출발한데다가 여러 방향에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연구되는 만큼 기호학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여전히 진행 중인 학문이다.

기호학은 기호들에 대한 통일적인 학문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태동하였는데 그 직접적인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크리틸루스』에서 언어의 기원에 대해 깊은 성찰을 전개하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사학』과『해석론』에서 명사에 대해 논하고 있다.

기호학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seme에서 유래한 것이다. 학문분과로서 기호학은 ‘기호에 대한 분석 또는 기호 체계의 기능 작용에 대한 연구’로 간략히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잠깐 언급했듯, 기호체계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고대에 있었던 기호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논쟁은 기원전 약 300년 전 아테네에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자연적 기호(자연 여기저기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기호)와 규약적기호(주로 의사소통의 목적을 위해 계획된 기호)사이의 차이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스토아학파는 오늘날 우리가 의학적 증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대표적인 기호의 예로 설명하였다. 고대에도 증상은 기호의 전형적인 본보기로 여겨졌다.

중세에 기호에 대해 깊은 서찰을 전개시킨 사람으로는 단연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꼽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기호 사상은 이후 서구에서 전개된 수많은 기호사상의 초석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규약적 기호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주석가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규약적 기호야말로 진정한 철학적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밖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어가 어떻게 정신어휘에 상응하는지에 대해 논하는 등, 기호 연구의 범위를 한정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호학의 범위를 한정시킨 것은 이후에 진행된 기호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기호론은 영국의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엄 오캄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된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존 로크의『인간오성론』에서도 발견된다.

앞서 살펴본 서구 철학자들은 비교적 초기의 기호학자들로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호학은 20세기 두 명의 기호학 창시자가 등장한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3.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와 구조주의                        


 
페르디낭 드 소쉬르
소쉬르는 현대 언어학의 출발점이 된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학의 대상과 성격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언어는 관념들을 표현하는 기호들의 체계이며, 따라서 글쓰기, 수화, 상징적 의례들, 예절 형식들, 군대 신호들 등과 비교될 수 있다. 다만 언어는 그런 체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생활 속에서 기호들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심리학의 일부분을 이룰 것이며 ,따라서 일반 심리학의 일부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호학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기호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법칙에 지배되는가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기호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될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할 권리가 있고, 그 위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언어학은 그런 일반 과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기호학이 발견하는 법칙들은 언어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학은 인간적 현상들의 총체 속에서 분명하게 정의된 영역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부할 정도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지만 소쉬르가 현대 기호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언제나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구절이다.
 분명히 소쉬르에게 기호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었으며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분야에 대한 일종의 계획 또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학문으로서 존재의 당위성과 구체적인 연구 대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기호 체계들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며, 결과적으로 언어학은 기호학의 일부가 될 것이다. 물론 이후의 연구 방식과 성과들에서 알 수 있듯이 기호학은 언어학에 빚지고 있는 바가 크다. 기호학에서 사용하는 많은 용어와 개념들을 비롯하여 기본적인 분석 모델과 방법론들도 대개 언어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언어는 소쉬르의 지적대로 여러 다양한 기호 체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호학이 전적으로 언어학의 성과들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언어 이외에도 다양한 기호 체계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제각기 상이한 접근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소쉬르의 이론은 언어학과 시학, 철학, 문화인류학, 정신분석학 등을 총 망라하는 어떤 지극히 포괄적인 관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공통의 구심점은 아마도 언어로, 구조주의는 언어를 하나의 구조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론과 연관된다. 구조란 어떤 규칙적인 조직체를 전제로 한다. 언어를 비롯한 모든 기호는 하나의 조직, 즉 자연적인 것이든 관습적인 것이든 일정한 규칙들의 체계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고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언어를 구조와 체계로 기술하고 분석하는 방식은 다양한 인문과학 분야에서 유용한 모델이 되었으며, 그것이 구조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언어 이외의 다른 기호 체계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여러 가지 흥미로운 연구와 분석들이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기호학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쉬르의 이론은 덴마크의 뛰어난 언어학자 옐름슬레우에 의하여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기호학으로 발전하였다. 옐름슬레우는 기호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기호학, 소위<기호들의 기호학>을 정립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기호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소쉬르의 관념을 발전적으로 전개시킴으로써 프랑스 기호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4. 퍼스(Charles Sanders Perice)와 해석 기호학                       


 현대 기호학의 또 다른 출발점은 미국의 철학자 퍼스였다. 소쉬르의 기호학이 언어학에서 출발하였다면, 퍼스의 기호학은 철학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퍼스에게 있어 논리학은 단지 기호학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기호학은 기호에 대한 거의 필수적인 또는 형식적인 이론이었다. 아울러 그는 자부심 넘치는 어조로 자신이 기호학의 개척자임을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내가 아는 한 나는 기호학이라 부르는 영역, 즉 모든 가능한 세미오시스의 본질적인 성격과 근본적인 다양성에 대한 학문을 시작하고 명백하게 밝히는 작업에서 개척자, 아니 처녀림의 탐험가이다. 선구자에게 그 영역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그 노고는 너무나도 크다.

 그 방대한 영역의 탐색에 걸맞게 퍼스는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글들에서 기호의 본질과 작동 원리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규명하였다. 그의 기호학 이론을 한마디로 요약하거나 체계적으로 기술하기는 어렵다. 가령 그의 유명한 삼원적 분류 방식을 토대로 하는 기호들의 유형과 범주 구분은 지나칠 정도로 복잡하고 현란하게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것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신조어들은 그 의미조차 분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의 기호학적 논의는 때로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으로 보이기도 해 그가, 혹시 관념론자가 아닌가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명목론을 비판하고 직관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입장이었고, 따라서 실재론의 기반 위에서 기호학을 체계화하였다. 사실 퍼스는 기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방대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어쨌든, 퍼스에게 기호학은 본질적으로 철학적 학문이었으며, 논리학 및 현상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에게 기호학은 구체적인 현실과 경험에 토대를 둔 실재론적 관념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단계, 아니 필수적으로 그 전에 정립되어야 할 학문이었다. 그의 기호학은 바로 논리학과 동의어였다. 실재론이 모든 존재의 독자적인 실존을 인정하고 또한 존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기호학은 그런 인식 과정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인식되는 것보다는 대부분 재현을 통하여 인식되며, 재현은 바로 기호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철학사에서는 대개 퍼스를 프래그머티즘, 즉 실용주의 철학의 창립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한다. 물론 그는 미국에서 실용주의가 널리 확산되었을 무렵 자신의 이론이 일반대중에게 소개된 경향과는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구체적인 경험들과 현실의 실재성에 대한 그의 관념이 바뀐 것은 아니다. 퍼스의 실재론적 입장은 그의 기호학 이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된다. 기호의 본질과 작용 원리에 대한 그의 인식은 겉으로는 아무리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보일지라도 화용론적 입장에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퍼스의 기호학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모르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출신으로 1940년대 이후 미국에서 활동한 야콥슨의 언어학과 시학 이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소쉬르와는 달리 퍼스의 독창적인 기획은 미국에서 화려하게 꽃피지 못하였다.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미국의 학계에서 다양한 유형의 커뮤니케이션 이론들이 발전하였지만, 퍼스의 기호학을 직접적으로 이어 받은 것은 아니었다.

 퍼스의 기호학은 이탈리아의 탁월한 학자 움베르토 에코에 의해 오히려 유럽에서 고유의 풍부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에코의 기호학 이론이 전적으로 퍼스에게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에코는 고유한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의 풍요로운 성과들과 구조주의 언어학, 야콥슨과 바릍츠의 기호학적 제안 등 다양한 원천에서 자양분을 얻었으며 또한 자신의 스승이었던 파레이손의 미학과 해석 이론을 이어받고 있다.
 에코가 퍼스의 기호학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해석의 관념이다. 퍼스는 다양한 형태의 인식 양상들을 통일적으로 고찰하기 위해 자신의 기호 개념을 활용하였다. 우리의 인식은 대부분 기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든 기호는 수신자에 의해 해석될 경우에만 기호로서 작용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기호 유형들 중에서는 특히 상징기호는 수신자의 추론 작업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해석은 기호의 존재 자체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5. 로트만과 문화                                                      


 위에서 언급된 학자 이외에도 기호학의 발전에 기여한 학자들은 많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벤베니스트, 바르트,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현상학의 대가 메를로퐁티, 러시아의 민속학자 프로프,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 프라하 학파, 그리고 다른 많은 학자들이 독자적인 방식으로 현대 기호학의 토대를 쌓는데 공헌하였다. 분명히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기호학이라는 공통분모로 결집될 수 있다. 기호학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론과 모델, 분석도구들을 체계화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쉬르와 퍼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동시에 아우르면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한 사람도 있는데 그중 대표적 인물이 유리로트만이다. 러시아 태생인 그는 1950년대부터 에스토니아의 타르투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남긴 커다란 업적 중 하나는 타르투-모스크바 기호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구소련 기호학계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소위 타르투학파는 독자적인 노선으로 고유의 기호학을 정립할 수 있었다. 로트만의 작업은 주로 문학 텍스트들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단순한 텍스트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토대로 문화 일반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전개하였다. 특히 문화 일반을 기호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문화의 유형들을 독특한 범주로 분류하면서 그 특징적 양상들을 기술하였다. 총체적인 문화 분석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로트만의 이론은 문화 기호학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로트만의 또 다른 업적은 문화 자체를 전적으로 기호학의 관점에서 고찰할 필요성을 역설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 전체를 포괄적으로 기술하고 그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양상들을 포착하기 위해 기호권이라는 계념을 제안하였다. 기호권이란, 대기권, 생물권 등과 같이 일정하게 정해진 영역을 가리킨다. 그것은 소리, 냄새, 색깔, 움직임, 접촉, 화학적 신호, 전파 등 다양한 신호와 기호들을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으로 구성된다. 바꾸어 말하면 기호권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기호들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호권 안에는 일련의 제약과 조건들이 부과될 수밖에 없다. 즉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주민들은 청각, 시각, 후각, 촉각, 또는 화학적으로 구성된 일련의 기호들을 습득해야 한다.
 로트만 이론의 특징은 문화의 기호학적 성격을 재확인하고 강조한데 있는데, 기호학은 따라서 모든 문화 현상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모든 문화가 기호이며 기호는 바로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6. 기호의 구조                                                       


 기호의 정의와 기호의 몇 가지 대표적 모형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기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기호의 종류와 성격, 기능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소쉬르가 제시했고, 바르트가 정교화한 기호의 모형부터 살펴보자.
 위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기호는 세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기표, 기의, 그리고 기호 자체이다. 이중 세 번째 요소, 즉 기호 자체는 기표와 기의가 연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요소이다. 기호의 삼부모형은 기호를 나르는 운반체가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즉 그것이 언어이든, 몸짓이든, 도상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틀을 유지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로 (기호 자체 포함) 이루어진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호 = 기표 + 기의


 기호학의 원칙은 사회현상을 기호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대치작용은 의미작용이라는 수속을 필요로 한다.


  1) 기호 = 기표 +기의

 밸런타인데이를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가령 A양이 B군에게 초콜렛을 줄 경우, A양은 B군에게 사랑을 표시하기 위한 기호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불쑥 초콜렛을 주는 것이 기호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추상적 관념으로 기의라고 부른다. 기의는 정신적 의미이기 때문에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의미의 운반체가 필요하므로 이 때 운반체를 기표라고 부른다. A양은 알맞은 기표를 골라 기의를 담아내야 비로소 기호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시가 소쉬르가 소개한 기호의 체계이다.

  2) 의미작용

 이처럼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작용을 의미작용 또는 의미화라고 부른다. 의미작용은 기호를 만들어낼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기호의 의미를 풀이할 때에도 일어난다. 가령 위의 예시에서 B군이 A양의 초콜렛을 받았을 때 그는 초콜렛에 어떤 의미가 결합되어 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B군이 초콜렛을 받고 A양이 날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으면 의미작용은 B군 쪽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의미작용은 두 가지 방향으로, 즉 기호를 만들 때(기호작용)와 기호를 풀이할 때(기호해석) 일어난다. 또한 초콜렛을 매개로 한 의미작용을 통해 A양과 B군의 사이에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이다. A양이 초콜렛을 사랑의 기호로 만들때의 의미작용과 B군이 초콜렛을 A양의 사랑이 담긴 기호로 받아들일 때의 의미작용이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을 때 둘 사이에는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의미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은 서로 관련이 있지만 서로 다른 현상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기표를 전달하는 과정인데, 이럴 때의 기표는 흔히 메시지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의 전달과정으로서 같은 의미작용이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일어날 것을 미리 기대하고 쌍방이 참여하는 행위이다.
 의미작용은 기표에 기의를 더하거나 빼내는 작용이다. 특히 메시지의 수신자 쪽에서 보면 의미를 재생산해내는 작용이다. 의미는 전달될 수 없다. 그래서 송신자 쪽에서 일어난 의미작용은 수신자 쪽에서 일어나 ㄹ의미작용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양쪽의 의미창출은 서로 독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하는 것은 전달된 기표뿐이고, 전달된 기표는 수신자에게 의미를 재생산할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전체적 의미작용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 여기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내부세계에 축적되어 있는 기의이다. 어떤 기표가 주어질 때, 그것에 연결시킬 적당한 기의가 없으면 의미작용은일어나지 않는다

 내부세계, 즉 마음은 문화적 체험의 창고라고 볼 수 있다. 걱에는 잡다한 관념, 이미지 등 지각요소의 계열체가 들어 있다. 이것은 모두 기의이기 때문에, 위으 그림에서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기의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인간을 이미지 저장소image-repertoire 라는 말로 표현한다.

 라캉의 Sr/Sd 모형이 암시하는 것처럼, 인간은 기표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존재이다. 라캉에 의하면, 우리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이와 같은 미끄럼을 타다가 소급하여 의미작용의 고리에 매듭을 매김질할 때이다. 즉 의미는 지나간 것을 되돌아보는 어느 구간에서 생겨난다. 의미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돌아보는 구간의 폭을 조정하는 것에 따라 거기에 잡히는 기표의 조합도 달질 것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의미도 다소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의미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안정된 것을 원한다.

 결국 라캉이 보는 인간은 자아와 의미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움직임속에 사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신화학자인 캠벨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체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대 자신의 의미는 그대가 거기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자아가 여기 있다는 것 - 그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인간이 바로 기호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또 캠벨은 자아가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희열이 바로 인생의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희열은 도대체 어떻게 느껴지는 것일까? 기호를 통하여 느껴진다. 희열의 느낌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인식이 느낌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을 의미 있게 한다는 것은 결국 느낌의 해석이지 않은가? 결국 인생이 의미를 추구하든 안하든, 의미는 따라오게 마련이다. 방브니스트는 소쉬르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인간 자신이 하나의 기호이고, 그의 사상이 하나의 기호이며, 그의 하나 하나의 감정이 기호이다. 이를 근거로 캠벨의 말을 다시 읽으면, 그는 사람이 자신 안에 체현하고 있는 의미를 생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거기에 단순한 기표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기호이다. 기호로서의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의미와 더불어 거기 있는존재이다.


  3) 기호, 거짓, 진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기호는 몇 가지 중요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에코의 거짓말 이론을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기호학은 기호로 쓸 수 있는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 어떤 다른 것을 의미 있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기호가 될 수 있다. 어떤 다른 것이란 기호가 그것을 표상하고 있는 시간에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없고 실제로 다른 곳에 있어도 된다. 그래서 기호학은 원칙상 거짓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만약 어떤 것이 거짓을 말하는데 쓰일 수 없다면,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에도 쓰일 수가 없으며 말 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짓에 관한 이론의 정의를 일반기호론의 꽤 포괄적 프로그램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위의 인용구에서 기호의 두가지 특성, 즉 기호의 표상성과 진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가지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철학적 명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기호의 표상성은 기호가 현실체를 어느 정도 인간의 인식에 반영해 주느냐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편 기호의 대상성은 기호의 표상성을 다른 각도에서 하는 말인데, 현실체에 관한 존재론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① 퍼스의 삼부모형
 기호의 표상성(또는 대표성)에 대해 첫 번째로 살펴보도록 하겠따. 어떤 다른 것을 의미있게 대신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기호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기호의 표상성을 나타낸다. 한 기표가 다른 어떤 것을 표상함으로써 기호가 될 수 있따는 기호의 존재 양식이 흥미롭다. 이러한 기호의 표상성을 잘 나타낸 것이 미국 기호학의 창시자인 퍼스의 모형이다.
 영국의 수사학자 오그든C. K. Ogden과 리챠즈I. A. Richars(1989)의 용어를 써서 설명해 보자. 오그든과 리차즈는 물체를 대상체referent라는 말로, 해석체를 사상체reference라는 말로 표현한다. 만들어진 기호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기호가 일단 만들어지면, 그것이 대표하고 있는 어떤 것(물체 또는 대상체)을 은연중에 항상 지시한다. 그래서 대상체는 기호 주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좀더 나가면 기호는 실제 대상체를 잠적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기호는 대상체를 시야 밖으로 사라지게 한다. 대표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대상체가 기호 주변에 얼씬거리면 기호가 대표로서의 구실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 라캉의 말을 빌려 말하면 기호는 대상체를 <뒤로 밀어버리는defer> 역할을 한다.

 둘째, 만들어진 기호는 대상체를 대표함과 동시에 어떤 정신적 개념을 띠게 된다. 이것은 위에 인용된 방브니스트의 말 중 다른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 사실은 기호의 대표성이란 해석체를 기호 사용자의 마음속에 유발시켜 주는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능력의 일부는 기호 사용자의 과거 경험을 빌리는 데서 얻어지기도 한다. 기호는 대상체를 사라지게 하는 대신, 해석체(또는 사상체)를 떠오르게 한다.

 퍼스의 모형은 실상 소쉬르의 모형과 큰 차이가 없다. 이 두 가지 모형은 강조점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을 뿐 형식상 같은 것이다. 퍼스모형의 물체(대상체)는 소쉬를 모형의 기표에 해당하고, 해석체(사상체)는 기의에 해당된다.

 ② 표상성 (대표성)
 소쉬르의 예를 들어 다시 기호의 표상성을 따져 본다면 기호의 또다른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A양이 만든 사랑의 기호의 예를 다시 들자면, 왜 하필 사랑을 표시하는 도구가 초콜렛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자의성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의 기호가 만들어질 때 기표와 기의는 기호 제작자 마음대로 연결된다.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기호를 이루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자연적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소쉬르의 주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자연적 연결이 존재하는 기호도 있다고 반론을 펴는 기호학자들이 있다. 가령 꽃벌의 붕붕소리, 돼지의 꿀꿀소리 같은 의성어에서는 기표와 기의 간의 자연적 연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호들을 볼 때, 소쉬르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된다.

 ③ 진위성
 앞에 인용문에서 에코는 기호가 어떤 것을 표상하고 있는 동안, 그 어떤것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없고, 어디엔가 실제로 다른 곳에 존재해도 된다고 한 후 그래서 기호학은 원칙상 거짓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거짓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기호이고, 기호가 대표하는 어떤 것은 퍼스의 용어로는 물체, 오그든과 리차즈의 용어로는 대상체이다. 이 인용에 나타나는 두가지 중요한 점을 논의해보자. 첫째는 물체 또는 대상체의 성질에 대해서, 둘째는 거짓의 성격에 대해서이다.

 물체의 존재 여부는 물체와 기호의 실존적 연계나 근접성을 두고 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의미는 좀 더 광범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첫째로 물체란 반드시 물질적 실체일 필요가 없고 관념적 물체이어도 상관없다. 즉 대상성은 물질적 실체와 관념적 구성물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둘째로 물체는 실존하는 물체와 허구적인 상상물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즉 기호는 물질적인 것에서 관념적인 것까지, 존재하는 것에서 허구적인 것까지 무엇이든 대표할 수 있다.

 기호의 이와 같은 엄청난 대표력 내지 표상력은 기호의 자의성과 더불어 기호의 무한한 생산을 허용한다. 실제로 수많은 가공적 기호들이 철학자, 수학자, 예술가, 미디어 종사자 등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진리, 정의, 무한, 허수, 용, ET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기호의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공상력과 창의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기호의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공상력과 창의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물질적 자연계와 우주는 유한한 것 같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공의 세계는 무한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대 미디어시대의 사람은 점점 자연을 떠나 환상적 가공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과현실적 세계에 한없이 미혹되고 있다. TV가 보여주는 과실재성과 과공간이 TV 시대에 테어나는 아동들의 자연이 되고 있고, 신이 창조한 저 밖의 자연은 흥미 없는 제2의 자연으로 멀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기호의 유혹에 사로잡혀 인조기호의 세계에 침잠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꽃잎의 세포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보다는, TV 화면에 나타나는 가공의 이미지들, 즉 닌자 거북이, 터미네이터, 비디오게임 쪽을 택한다. 정상배들은 가공의 통계숫자를 가지고 민심을 조작하고, 텅 빈 정치공약을 가지고 민심을 선동한다. 기기하게도 그런 것이 시민들에게 잘머혀든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점점 가공적 기호의 세계에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거짓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에코가 말하는 거짓이 가공적인 것을 표상하는 기호의 기계적 능력만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을, 기호를 통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거짓까지도 뜻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조작을 모조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호는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만드는 능력도 있다. 이와 같은 조작을 비모조라고 한다. 비모조는 두 가지로 작용할 수 있다. 있는 것을 비모조화하는 것과 없는 것을 비모조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있는 것을 비모조화하는 것은 신앙 같은 것을 일으킨다. 그러나 없는 것을 비모조화하는 것은 순수한 모조로 거짓 중의 거짓이다. 비모조는 내놓고 하는 사기이기 때문에 거짓이 분명하여 진위판단의 원리가 위협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순모조는 진위판단의 기준을 훼파하여 진실과 거짓, 실재와 가공의 차이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순모조는 현실성을 우회하여 기호에게 기호 스스로의 복제 재생산 능력을 준다. 보드리야르는 있는 것의 비모조에 의해서는 신학이 일어날 수 있지만, 순모조가 판을 칠 때는 신조차 자기 자신을 신으로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온 우주가 비결정성으로 바져든다고 했다. 파국이 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호는 거짓말하는 능력 외에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있다. 기호는 진실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이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호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기호가 갖는 이 역설은 중요한 이원론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거짓 없이 진실을 알 수 없고, 진실 없이 무엇이 거짓인가를 알 길이 없다. 결국 진실과 거짓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기호 속에 함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기호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거짓을 말하는 능력만큼 강력한 것이다.

 기호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레마스가 등가의 논리라고 부르는 것을 살펴보자.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하나의 표현과 다른 하나의 표현 사이에 존재하는 등가성을 가리키고 있다. 두 가지 표현 사이에 번안이 일어나는데 그 진실성이나 허위성은 등가성이 어느 정도 개재하느냐의 문제로 낙착된다.

의미작용이란 단순히 언어의 한 수준에서 다를 언어로 옮기는 조작이며 의미란 단순히 이러한 번안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좀 극화해서 말하면, 인간의 초언어적 담론은 단순히 일련의 거짓이고, 커뮤니케이션은 일련의 오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등가성의 크기가 진실과 허위의 문턱의 높이를 정하는 기분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푸코가 말하는 진리의 상대론과 맥을 같이 한다. 푸코에 의하면, 진리는 항상 담론에 대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항상 번안에 대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항상 번안에 대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번안과 담론에는 어쩔 수 없이 거짓이 기여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번안과 담론에 크던 작던 엄연히 존재하는 진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기호학은 기호의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기호들로 하여금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도록 한다. 기호학자들에게는… 거짓과 진실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거짓과 진실이 만나는 장은 기호학자의 마음이며, 거짓 대 진실의 비율이 기호학자에게서 명확히 드러남을 뜻한다. 일반인에게도 이 장이 똑같이 펼쳐져서 기호학적 담론이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때, 개인적 해석관례와 집단적 해석관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은 홀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그레마스는 전망한다.

 공감대의 크기는 소위 상호주관성의 크기와 같은 것이다. 상호주관성은 집단적 개념으로 어떤 집단에게 마치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그것에 의해서, 오해와 거짓을 극복하고 이해와 진실을 향해 움직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기호들, TV, 영화, 신문, 잡지 같은 현대 매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기호들, 우리를 한없이 유혹하는 광고나 선전문 속의 기호들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하여 거짓을 폭로하는 일이다. 우리를 항상 진실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 기호학의 윤리적 사명이다.


 7. 기호와 의미                                                        


 기호학은 의미의 창출과 해석을 위한 학문이다. 여기서는 기호가 지니는 의미와 기호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호를 분석하기 위해 처음 할 일은 기호의 유형을 가려내는 것이다. 기호에 대한 정의와 마찬가지로 기호들을 분류하는 방식도 학자들에 따라 다르다. 퍼스는 기호를 삼원적 관계로 정의하면서 기호의 유형도 삼원적 분류 방식으로 구분한다. 퍼스의 관념에서 중요한 것은 세가지 기본적인 범주의 구별로서 각각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으로 일컬어진다. 깊이 살펴보자면 더욱 모호해짐으로 기호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분류중 하나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퍼스의 분류에서 바로 기호와 대상 사이의 관계 양식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1) 도상

 도상은 고유의 대상과 닮은 기호이다. 즉 기표와 기의가 객관적으로 보아 서로 닮은 기호,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 기호를 사용하는 사회적 집단이 서로 닮았다고 인정하는 기호이다. 가령 그래프나 그림은 그것이 재현하는 것과 닮은 경우에만 도상기호가 된다. 그런 유사성 또는 비슷함 때문에 도상은 표현과 내용이 동기있는 관계로 상호 연결된 기호이다. 도상적인 닮음은 주로 시각적 기호들에서 효과적으로 재현된다. 초상화나 풍자화, 삽화, 지도, 전기 회로도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언어에서는 의성어가 도상기호에 속한다.
 도상기호는 대상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에게 일종의 현실효과를 가져다준다. 즉 대상을 실감나게 재현함으로써 직접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텔레비전이나 영화처럼 멀티미디어를 최대한 활용하는 텍스트들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2) 지표
 지표는 고유의 대상과 사실적이고 인과적인 관계로 연결됨으로써 그 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기호이다. 따라서 지표적 기호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물리적 가까움을 특징으로 한다. 예컨대 연기는 불의 존재를 가리키기 때문에 기호가 된다. 다른 지표 기호들의 예로 서명,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바람의 방향을 알려주는 풍향계나 펄럭이는 깃발, 또는 나, 너 같은 인칭대명사 등을 들 수 있다. 어떤면에서는 사진도 지표에 속한다. 사진이라는 기표는 사진에 찍힌 대상이 어느 순간 사진기의 렌즈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의 경우 사진속에 재현된 이미지는 고유 대상의 모양을 거의 완벽하게 닮은 형상으로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도상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인가를 지시한다는 것과 관련하여 지표는 특히 거짓말을 하는데 많이 사용될 수도 있다. 수신자를 속이기 위해 손가락으로 엉뚱한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한 지표의 경우 고유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문화적 훈련이 필요한데, 가리키는 손가락이 고유의 대상을 대신하는 것은 손가락과 대상 사이에 설정되는 보이지 않는 연결 때문이다. 손가락 기표는 기표 자체보다는 가리키는 방향에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지표의 경우 특히 지시대상과의 관계를 놓치면 기호로 작용하지 못한다.


  3) 상징

 기호 기능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것이 상징기호이다. 기호분류에서 상징은 기표와 기의가 관습에 의해, 소쉬르의 표현에 따르면 동기 없는 관계로 상호 연결된 기호이다. 상징적 기호는 고유의 대상과 닮은 것도 아니고 인과적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다. 단지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관습에 의해 상호 연결된 관계, 즉 자의적인 관계로 만들어진 기호이다. 하나의 동일한 대상을 가리켜 서로 다른 언어들에서 제각기 달리 부르는 것이 그런 자의적 관계의 대표적인 예이다. 가령 동일한 대상을 한국어로는 /나무/라 부르고 영어로는 /tree/라 부르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자의적이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의로 만들어져서 약속에 의해 알게 된 것이 상징이기 때문에 상징 역시 거짓을 말하는 데 쓰인다. 자의성과 규약이 상징의 일반적 성질인 까닭에 상징으로 일어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현상들, 예컨데 지식, 관념, 이데올로기 등이 겉으로는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론을 임의적으로 조작해서 얻은 동의에 불과하다는 것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에 의하면 지리란 여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진리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진리는 근본적으로 기호 조작에 의해 탄생된 허구이다.
 그러나 상징의 본래적 자의성에도 불구하고 상징은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일단 상징을 약속에 의해서 배우고 습관화, 체질화하고 나면 상징은 그것의 한계를 넘는 크고 작은 고차원의 의미작용을 우리의 마음에 일으킨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1+1이 어떻게 2가 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책 한 구너 분량의 이야기를 썼다지만 결국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은 1+1=2라는 사실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라는 것을 중학교 때 배워서 앍 있다. 고등학교쯤 가면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고 지구 같은 구체 위에선 180도 보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유클리드의 평면기하학에서 최근의 입체기하학으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점점 더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어쨋거나 이 모든 논의가 상징을 빌려 알게 된 것이다.

 기어츠가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상징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상징의 세계에 태어나서 상징의 삼투작용을 체험하며 성장한다. 우리의 두뇌는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체험하여 체화한 상징들의 보고이다. 그래서 많은 상징이 우리에게 어떤 의식과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불러일으킨다는 뜻은 우리의 이성에 앞서, 먼저 일어났던 기호의 작용이 이미 우리 안에 숨어 있다는 말이다. 상징의 자의성이나 규약 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상징은 매우 의미심장한 정념과 인식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어머니 라는 세 음절의 말이나, 세 개의 글자 자체에는 어머니다움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어머니 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은 우리에게 온갖 정념을 일으킨다. 싯구들은 상징들로 되어 있는데도 우리의 가슴을 뒤흔들고 음악은 상징들의 흐름인데도 우리를 열광하게 한다.

 진, 선, 미 – 모두 상징이다. 위, 악, 추 – 역시 상징이다. 정의, 자유, 평화 – 모두가 상징이다. 이런 상징들의 대상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대상체는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면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관념의 조각에 불과한가? 아니면 그런 것은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기호에 의해서만 인생을 의미 있게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가 이러저러하다고 누가 말했기 때문에 왼쪽으로 옮길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옮겼던 것도 사실이고 편한 인생보다는 어떤 위험을 무릅썼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그 모든 체험에 기호는 함께 있었고 우리는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가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가려고 공상하는 것만큼 기호는 그 울타리를 넓힐 따름이다. 우리는 언제나 기호의 이쪽에 갇혀 있다. 그리고 기호의 피안은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8. 코드와 코드화                                                      


  앞에서 기호가 만들어지고 해석되는 과정(의미과정), 기호의 종류와 특성, 의미의 여러 형태와 가능성, 사람들이 현실계를 축조하고 이해하기 위해 이용하는 기호들의 형태 등을 살펴보았다. 기호의 특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호의 자의성 또는 인조성이다. 기호의 자의성은 두가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 방향은 기호의 자의성을 체계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에 의해 과학이 성립한다. 다른 한 방향은 기호의 자의성을 이용하여 기호의 변용을 극대화시키는 일로 예술을 일으킨다. 앞의 것은 친숙화이고 뒤의 것은 낯설게하기 인데 이들이 나아가는 방향은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어디까지나 기호의 코드화라고 하는 한 가지 조작 위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발전양태이다. 여기서 코드화라고 함은 기의와 기표 간의 관계를 정립하고 정립된 관계를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들에게 수용시키는 기호학적 조직을 말한다.
 친숙화는 코드화에 순종적이지만 소원화는 코드화에 반동적이다. 소원화가 코드화를 거부하거나, 그것에 어떤 변모를 일삼지만 그것은 이미 코드화된 것으로부터 소원화를 기할 수 있을 뿐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소원화는 끝이 풀려지고 있는 매듭 같은 것으로 항상 매듭의 끝에 연결되어 있다. 소원화는 어떤 매듭이 어떻게 풀려나가고자하는 것인지, 은연중에 그 본원을 의식하고 일어나는 노력이다. 코드화된 것 없이 소원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즉 소원화를 위한 소원화란 있을 수 없고 있다고 해도 전혀 무의미하다. 어쨌거나 코드화가 기호의 자의성을 조정하는 기본 기제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기호가 전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더러는 자연에 주어져 존재해 온 기호들이고, 더러는 순전히 인위적으로 제작된 기호들이다. 전자는 자연기호로써 자연속에서 발견되는 이미지들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감각기관에 일어나는 물질적 이미지들, 즉 망막에 투사된 가시이미지나 피부에 느껴지는 감촉 따위를 포함한다. 인조기호는 자연기호를 모조한것들 이거나 순전히 인간의 창의력에 의해서 고안된 기호들이다. 인조기호는 순전한 고안인 언어에서 tv화면이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포함한다.
 자연기호의 특성이 다분히 환유적임에 비해서, 인조기호는 은유적 특성을 갖고 있다. 자연기호들은 자연이라고 하는 거대한 배경에서 여러 가지 진화와 돌연변이를 거쳐 일어나는 기호체들이라는 점에서 환유적이다. 자연기호들이 어떤 형태를 취하건, 그것들은 자연이라고 하는 하나의 연속체 위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인조기호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인조기호는 자연이 아닌 다른 세계, 즉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성적 공간에 소속되어 있다. 인조기호는 인간문화를 구성하는 기호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인조기호는 자연과 문화라는 두 개의 다른 세계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이 두 번째의 경우 인조기호는 은유적이 된다. 자연에 태어난 인간의 입장에서 인조기호를 볼 때,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문화의 공간으로 전이된, 그래서 다분히 은유적 기호인 것이다.



 9. 기호작용                                                          


 지금까지 기호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을 소개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호는 감각자료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없기 때문에 직접 지각할 수 없는 것 조차 표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호는 즉각적 지각과 상징적 사이에 존재한다. 따라서 기호는 물질계와 정신계, 감각과 지성, 감각의 세계와 영혼의 세계를 연결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호의 능력은 인간의 현실세계를 축조하는 것이다. 기호들은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을 창조하게 한다. 사회, 언어, 예술, 신화 같은 것들은 모두 기호를 이용해서 인간이 일으킨 현실체들이다. 칸트에 의하면 물 자체는 불가해한 것이고, 카시러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은 물 자체의 본성에 접근할 수조차 없다. 인간에게 남겨진 선택지란, 물자체의 특성들을 조작하는것과 물 자체 위에 상징의 질서를 펴는 것이다.

 1) 인간 기호작용

 기호작용이란 문자 그대로 기호의 작용을 가리킨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호작용은 어떤 유기체에 어떤 것이 기호로 성립되는 기호공정이다. 인간에게 어떤 것이 기호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각작용을 통해야 한다. 퍼스에 의하면 기호작용은 기호가 해석자에게 일으키는 인식효과이다. 그 효과란 해석자의 마음에 새로 창출된 어떤 것으로 그 어떤것이 바로 기호이다. 이처럼 기호는 인간의 마음에 들어온다.
 여기서 기호는 두가지 면을 나타내는데, 우선은 어떤 것의 대표로서 인간의 외부로부터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운반체 같은 것이다. 그 어떤 것이 저 밖에 실존하는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떤 것을 대표하는 운반체로 들어오는 기호의 부분을 기표라고 한다. 마음속에 기표가 들어오고 나면 그것은 거의 무한정한 기의들을 일으킨다. 퍼스에 의하면 기호 자체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기호는 다만 해석자로 하여금 부수적 경험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도록 지시할 뿐이다. 기표가 들어오는 것을 계기로 해석자가 기의들을 찾아낼 때 기의들이 기호의 내용을 이루게 된다. 해석자의 마음속에서 기표라는 형식이 그것의 내용을 찾게 될 때 하나의 기호가 성립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의들은 개념, 정신적 이미지, 또는 기호가 대표하고 있는 어떤 대상체에 대해 진술된 것들을 포함한다.
 기호가 인간의 마음에 격발시키는 사고작용은, 기표가 계기가 되어 기의들을 찾는 과정이다. 하나의 생각은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기호작용은 간단없이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퍼스에 의하면 사고 하나하나가 기호이다. 퍼스는 이 무한정한 기호작용을 자아의 다른 위상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적인 것으로 본다. 같은 맥락에서 세보크도 기호작용을 메시지 교환과정으로 본다. 퍼스의 기호작용은 개인 내부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임에 비해 세보크의 기호작용은 인간과 다른 유기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확장된 것이다.


  2) 기호작용의 두 지류

 기호학은 기호작용을 두가지로 자른다. 하나는 우리가 이미 익히 아는 의미작용이고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특히 에코는 이 두가지에 서열을 매기고 있는데, 의미작용은 커뮤니케이션보다 고등한 기호학적 상호작용이다. 의미작용은 항상 사람을 상대로 일어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아무것과도 일어날 수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은 기계와 기계 사이, 사람과 기계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동물 사이 등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의미작용의 종착점은 언제나 사람이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의미작용 없이도 일어날 수 있지만 의미작용은 커뮤니케이션이 선행되어야 한다.
 에코가 의미작용을 사람에게 국한시킨 것은 기호가 근본적으로 정신적 과정이라는 사실과 부합한다. 기호가 정신과정인 것은 그것이 불가피하게 기의에 의해서 성립되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기호작용은 기표에 의해서 일련의 기의들을 마음에 창출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근본적으로 정신적 과정이다. 종합하면 기호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학은 기호와 인간의 상호관계를 인간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호는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매체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의미작용이 커뮤니케이션의 특수한 경우가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기호학이 인간 중심의 관점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이 의미작용의 특수한 경우가 된다는 역설이 얻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은 의미작용의 기본과징일 따름이다. 즉 그것은 의미작용이 어느 하부 문화 안에서 집단적으로 일어나게 해 주는 기본 희로망을 구성한다. 더욱이 커뮤니케이션은 의미작용의 다원성이 단일성으로 축소된 형태이다. 다원 의미체계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단일 의미체계를 구성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의미작용의 특수한 경우가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항상 문제되지만 의미작용의 수준에서는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커뮤니케이션이 특수현상인 것은, 커뮤니케이션을 성공시키기 위해 채용하는 통제라는 개념과 수신자의 비자율성이다. 통제는 송신자의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최적반응을 나타낼 수 있도록 혹은 송수신자간에 의사의 일치가 일어나도록, 메시지 자체를 특수화시키며 특수한 메시지 통로를 선택하는 작용이다. 이러한 통제는 수신자를 다분히 피동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기호학은 의미작용이 다원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적 상태를 그대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수신자가 자율적ㅇ로 의미를 창출하도록 모든 가능성에 개방시켜 준다.
 기호작용은, 사람이 기호를 넘어서 기호적 표상의 세계위에 펼쳐져 있는 드높은 진리에 이르는 수단이 된다.



 10. 참고문헌                                                         


「기호학이란 무엇인가」(1994) 김경용. 민음사
「기호학의 즐거움」(1994) 김경용. 민음사
「현대 기호학과 문화분석」(2005) 김운찬. 열린책들
「기호학」(2002) 폴 코블리. 김영사
「기호학사」(2000) 안느 에노 (한길크세주)